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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북

20년 걸린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 그 옛날 이 거대한

Dondekman 2018. 6. 2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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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 639년에 건설되어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며, 높이 14.5m로 가장 거대한 탑이다. 우리나라에 목탑과 목조 건축물만 있던 시대에 석탑으로 그 양식이 넘어갈 때의 흔적이기도 해서 역사적인 의미도 각별하다.

이 탑은 1999년에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전 상태가 심각하다는 판정을 받고 해체 및 수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화재청은 2018년 6월에 복원이 완료되었음을 밝힌다. 거의 20년만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461m 높이의 미륵산 아래 허허벌판 익산 미륵사지.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석탑이 보인다. 5~6층 아파트 높이인 25미터 정도 되는데, 저건 93년도에 완성한 동쪽 미륵사지 석탑 복원 버전이다. 

원래 동서로 쌍탑이 있었고, 중앙에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네.


논란의 동탑 복원


이 완전 복원 버전은 논란이 많다. 1991년, 노태우 정권에 의해 실행된 복원인데, 모든 전문가가 고증 불가라고 하는데도 정치적인 이유로 강행된 미륵사지 석탑 복원이기 때문이다.

탑의 기단석을 비롯해 많은 부재가 들어갔지만 국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물이라고.


서쪽 미륵사지 석탑 복원 전 모습


내가 중학교 때 수학여행 왔을 때만 해도 이 모습의 석탑이 저 완전 복원 버전과 동서로 나란히 있었다. 

조선 이전부터 미륵사는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고, 석탑도 전체적으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는데 일제시대인 1915년에 콘크리트를 부어서 계속 지탱해 왔다. 

이탑은 2001년에 해체 작업에 들어가 완전 해체된 바 있다. 해체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10년이나 걸려 해체한 이유는 다시 재조립을 해야 하기 때문.

이렇게 보호막을 짓고 다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들어간다. 3D스캐닝을 통해 미륵사지 석탑 정보를 모두 기록한 뒤 오염물 제거, 구조보강 연구 등을 한 뒤 2013년부터 본격적인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들어간다.


2018년에 완성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 모습


5년이 걸린 재조림 과정. 보수 과정을 보면 1층에 3달씩 걸린 듯.

원래 있던 9층이 아니라 6층까지만 복원한 것은 함부로 추정해서 무리하게 복원하는 게 아니라 문화재의 진정성을 지킨다는 원칙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부재 재사용률이 81%에 달하며 나머지 부족한 것은 재료의 유사성을 위해 미륵사지 인근의 황등 채석장[링크]에서 채취해 보강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듯


미륵사지 석탑 복원 보호막 안은 일반 관람객이 2층까지 올라가 탑의 상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탑 하단의 입구 구멍 속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핀 듯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콘크리트가 부어져 있었던 부분


기존에 콘크리트를 부었던 부분은 석재를 가지런히 쌓아 계단식피라미드처럼 만들어놓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는 현대의 첨단 복원 기술이 잘 접목되어 있다. 부재 접합에는 인공관절 접합에 쓰이는 티타늄 봉을 활용해 더욱 가벼우면서 튼튼하게 만들 수 있었으며, 석탑의 빈틈에는 신소재 무기질을 활용해 채워 놓았다.


핸드폰 하나만 들고 오면 역사 견학 제대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소를 비롯해 미륵사지의 모든 유물들 곁에는 QR코드 뿐 아니라 스마트폰만 가져다 대면 NFC작동을 통해 안내페이지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다.


미륵사의 개건 유래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의 건립 이야기와 서동요 이야기를 겹쳐놓았다.

신라에는 진평왕의 딸로 선화공주가 있었는데, 백제의 서동이 공주를 사랑해 노래를 지었다. 그리고 밤마다 공주가 자신을 몰래 만난다는 내용의 이 ‘서동요’라는 향가를 신라 경주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노래를 알게 된 선화공주의 아버지, 진평왕은 공주를 귀양보냈고, 서동은 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주를 구출(납치)했다는 내용이다.

지금와서 보면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에 납치에, 서동의 죄목이 이만저만 아닐 뿐더러 뒷조사도 안해보고 딸을 귀양보낸 아버지란 양반이 이해 안되지만, 어쨌든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이 서동이 뒤의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다. 그러니까 선화공주는 무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전화위복... 그리고 그녀가 무왕에게 청해 지은 절이 미륵사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진위여부에 논란이 많다. 현재의 중론은 미륵사는 당시 삼국통일 전쟁 때문에 암울했던 백성들의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국력을 모으기 위해 지은 절이라는 것.

불경에는 이상적인 왕이 다스리는 시기에 미래에 도래할 부처인 미륵이 온다고 써 있는데, 자신이 바로 그 왕이라고, 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는 것이다. 

전쟁과 신앙, 그리고 왕가의 고민이 느껴지는 이 옛 건축물에 햇빛은 오늘도 말없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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