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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북

시조의 집, 익산 가람 이병기 시인 생가에서

Dondekman 2017. 7. 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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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소에 들어있는 시간의 깊이를 들여다본다.

이 집은 국문학자, 시조 시인으로 유명한 이병기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연구에 매진한 곳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이병기 선생이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태어나고, 일하고, 죽은 곳이 같다는 것이, 지금같으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예전에는 평범한 일이었다. 그가 나고 죽은 이 집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는 예전의 평범함을, 지금의 특별함으로 받아들며, 왜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생각하는일이 된다.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6호다.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李秉岐 先生 生家, Garam Lee Byeongki Birthplace


여산 휴게소 순천방향과 지척

가람 이병기 시인 생가는 전라북도 익산 여산면 가람1길 64-8에 있다.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해 있는데, 여산휴게소 하행, 그러니까 여산휴게소 순천방향과 직선거리로 불과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걸어서 30분 거리긴 한데, 물론 훨씬 더 걸릴거다. 2km란 어디까지나 직선거리고 논을 그대로 가로질러서 걸어올 순 없을테니.


궁금증이 생겨 대중교통까지 검색해봤다. 여산휴게소 가까이 신외사 정류장에서 62번 버스를 타면 2정거장만에 신리 정류장이다. 여기서 걸어오면 가람 이병기 시인 생가 도착.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34분 걸리고, 그나마 1.3km를 걸어야 한다. 

그나저나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여길 올 사람은 없을텐데 내가 왜 이렇게 미주알 고주알 캐고 있지? ㅋㅋ 뭐랄까, 좀 낭만적이지 않은가, 여산 휴게소에 차를 받쳐놓고 익산여행하며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다니.



마을 입구에 시조의 마을이라고 쓴 팻말이 보이네. 익산 여산면 가람1길. 거리 이름부터가 이병기의 호를 따 가람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다


이병기 시조 <고향故鄕으로 돌아가자> 中에서



한국이 가장 가난할 때 태어나시고, 돌아가신 시조 시인

이병기 선생은 1891년에 태어나 1968년에 돌아가신 시조 시인이다. 

그러니까 1894년 동학농민운동 전에 태어나셨고, 1970년 새마을운동 전에 돌아가신 셈이다. 보통 나이 많으신 분들도 일제시대, 6.25전쟁 등은 아주 까마득한 일인데, 이병기 시인은 6.25때 이미 환갑의 나이셨네. 

이렇게 지금 연로하신 분들이 기억하는 옛날을 청년의 때에 살아오신 분을 생각하면 뭔가 신선하고 아득하다. 옛 전쟁터에서 발굴된 칼이나 총을 마주했을 때처럼.



맞춤법 형성에 관여

생가 자리와 돌아가신 자리가 일치한 분이 얼마나 될까? 시대가 갈수록 그런 일은 힘들어질 것 같다.

이병기 선생은 1939년에 가람 시조집을 펴내는 등 활발한 시조 창작을 했다. 정지용 시인은 "시조 창작의 양과 질로 가람의 오른편에 앉을 이가 아직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송강 정철 이후로 가장 빼어난 시조 시인이라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이병기 선생은 조선어문연구회를 결성한 국문학자이기도 했다. 국문학개론, 등의 저서가 있으며,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으로 있으면서 현재의 맞춤법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분이 없었다면 지금 포스팅하는 글 역시 그 형태가 달라졌을 것이다.


수우재(守愚齋)


갈망하라, 끊임없이 우직하게

국문학을 연구하고 시조를 짓던 이 집.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집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집에는 수우재(守愚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수우는 미련할 정도로 지킨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면 당대에서 반짝했던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었고,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도 여운을 남기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들이었다.



기와를 헐고 다시 초가로

1973년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지붕을 기와로 고쳤다가 다시 초가로 전환했다. 더 좋게 하려고 기와지붕을 올려놨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옛것은 옛것일 때 가장 뜻깊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우재로 들어가는 현관에 걸려 있는 사진. 

밑에 방명록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왔다. 지금은 마음 속으로 방명록을 쓴다. 갈망하라, 끊임없이 우직하게


이병기 생가의 탱자나무


이 탱자나무는 2001년도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 11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미터로 풍채가 좋다. 나무 수령이 2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보기만 해도 싱그러워 여름여행할 때 들르면 좋다. 전북 익산 데이트장소의 포토존으로도 유명하다.



이 탱자나무는 이병기 선생의 고조부가 심으셨다고 한다. 탐스럽게 영글어가는 8월의 탱자.

탱자나무가 200년 동안, 이렇게 매년 파릇했던 걸 생각해보면, 성숙과 새로움이 만나는 신비를 생각하게 한다. 시조 속에 흐르는 아름다움처럼.


이병기 생가의 정원에서 생각하는 시조


이병기 생가에는 연못이 두개 있고, 이를 중심으로 반 인공, 반 자연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런 자연 속에서 시상을 가다듬고 시조의 율격을 깎아냈던 이병기 선생의 마음을 더듬을 수 있는 정원이다. 현대시대에 매몰되지 않은 근대의 집과 정원을 찾고 싶다면 익산 가볼만한곳 중 하나일 듯.


시조의 형식

쉽게 말해 시조란 현대시보다 율격적인 요소를 더 살린 운문이다. 힙합에서 라임을 신경쓰는 것과 비슷하며, 그래서 시조는 시에 비해서 음악성을 더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운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현대시를 쓰던 사람이 개작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신춘문예같은 문학공모전에 내서 당선되기도 하더라.

평시조는 기본적으로 음절을 맞춰야 한다. 시와 시조의 차이점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종장 첫구절의 음절 숫자다. 평시조보다 자유로운 엇시조, 사설시조라고 하더라도 종장 앞의 음절 숫자는 지켜야 한다. 

초장 3,4,3,4 /중장 3,4,3,4 /종장 3,5,3,4,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이 평시조의 대표적 형태다.


오늘도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내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나


이병기 시조, <난초 3> 전문



생가의 분위기가 그의 시조 글쓰기와 많이 닮아있다.

후원에는 울창한 대나무숲. 바람 불때마다 대나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을 이병기 선생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그러고보면 이병기 선생의 시조는 자연이 인간 속으로 빨려들어오다가 멈춘 그 자리를 형상화한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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